이동 삭제 역사 ACL 마이클 조던 (r2 문단 편집) [오류!]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기울임취소선링크파일각주틀 === 조던의 피해자 === 압도적인 시대의 지배자였던 만큼, 조던만 없었다면 우승이나 개인 수상에서 더 큰 업적을 세웠을 레전드들이 많다. 물론 해당 목록의 선수들이 조던을 증오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오히려 리스펙하거나 절친한 사이인 경우가 많다. * [[도미니크 윌킨스]]: 소속팀 애틀랜타 호크스도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조던과 전성기가 겹치며 번번히 좌절을 맛봤고, 개인적으로도 조던에 밀려 득점 2위만 3번을 기록했다.[* 상술되어 있지만 조던의 1차 은퇴 이전 득점왕 7연패 기간동안 칼 말론과 각각 3, 4번씩 2위를 나눠가졌다.] 거기에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마저도 조던에 밀려 2위를 기록하고 만다. 심지어 이 경우는 윌킨스가 홈 어드밴티지에 밀려 조던에게 챔피언을 내줬다는 얘기도 있어서 억울함은 2배. 이때 도미니크 윌킨스는 본인 커리어에서 역대 최고라고 할 수도 있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1986년에 팀동료 [[스퍼드 웹]]보다 객관적으로 더 뛰어난 덩크를 보였음에도 단신 임팩트 때문에 패하고, 1987년에 부상으로 결장했던 윌킨스는 우승 트로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지금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덩크들을 연달어 선보였는데, 마지막에 본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투핸드 파워 윈드밀을 선보였다. 전에 시도한 조던의 투핸드 rock-the-cradle 덩크가 예상외로 48점을 받았기에 이 덩크가 만점이라면 윌킨스의 우승이 확정되는 상황이었고, 당연히 저건 만점감이었기에 다들 윌킨스의 우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이 덩크가 말도 안되게 '''45점을 받아서''' 윌킨스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심지어 시카고의 관중들조차 야유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뒤이어 조던이 그림같은 자유투 라인 덩크를 성공시키며 우승. 당시는 같은 덩크를 계속 해도 페널티가 별로 없는 시대이기도 했고[* 이때문에 1990년에 윌킨스와 붙어 아깝게 우승을 놓친 [[케니 스미스]]는 "도미니크가 나랑 붙었을때 똑같은 덩크를 세 번 했는데 똑같은 점수를 받았다"고 야유했다.] 도미니크가 윈드밀 일변도인 성향이 없잖아 있지만, 이날 도미니크는 똑같은 덩크를 거의 하지 않았고, 백보드에 볼을 튕겨 원맨 앨리웁을 하는 등 지금까지 기억되는 수많은 덩크를 선보였다. 특히 원맨앨리웁에선 방송국에서 그의 높이를 자체측정했는데 (물론 첨단 기술은 아니고 그냥 녹화화면 보고 한거라 정확하진 않다) 무려 10피트 2인치 (약 310cm)가 나왔다. 심지어 조던은 자유투 라인 덩크를 준결승과 결승에서 두 번했다. 그만큼 윌킨스는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이고도 우승을 강탈당한 거나 마찬가지라 그는 이때 준우승과 1986년 준우승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나 4번 우승했는데 두 번만 인정해주더라고." 다만 이게 논란이 적게 된 이유는 어쨌든 조던도 역대 최고의 덩커 중 하나인데다가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자유투 라인 덩크가 아름답기까지 할 정도로 완벽하고 멋진 덩크라 [* 조던은 슬램덩크 콘테스트에 나올때마다 최소 1번 이상 자유투 라인 덩크를 했는데 이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적은 없었다.]그의 우승이 충분히 납득이 갔기 때문. 이유가 어찌됐든 윌킨스가 당시 기준으로 만점이 당연한 덩크를 하고도 45점이란 말도 안되게 낮은 점수를 받고, 이 때문에 우승 기회가 사라진 건 맞다. 여담이지만 1985년에 루키 조던과 슬램덩크 콘테스트 결승에서 붙었을 때는 윌킨스가 우승했다. * [[아이제아 토마스(1961)|아이제아 토마스]]: 토마스를 위시한 배드 보이즈는 조던의 팀을 세 번 연속으로 탈락시키는 등, 조던의 성장 과정에서 있던 가장 큰 걸림돌이자 조던의 아치 에너미라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결국 조던의 성장으로 인해 스윕당하며 쓰리핏에 실패하는 결과를 맞는다. 토마스 본인은 조던의 인생 첫 올스타전의 Freeze-out 사건부터 시작해서 계속 악연으로 얽히게 되었고, 결국 조던을 중심으로 구성된 1992 올림픽의 1기 드림팀에 합류하지 못하는 결과를 맞았다. 커리어 전반적으로 보면 피해자라기보단 오히려 조던의 가장 큰 벽이라고 보는게 맞다. 커리어 초반에 디트로이트는 불스를 지독하게 괴롭혔으며, 토마스 본인은 부상으로 인해 꽤 이른 나이에 은퇴했기 때문에 통산 전적이 36승 29패로 조던에 앞서며, 그 중 플레이오프에선 22승 12패로 압도한다. 플레이오프에서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불스는 3년 연속 디트로이트에게 패했고, 1991년에 불스 왕조가 시작된 직후에 팀이 몰락했기 때문에(1991-92 시즌에는 48승으로 5번시드를 받았지만 1라운드 탈락했고 이후 1996년까지 계속 플레이오프 탈락) 불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붙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또한 드림팀의 경우 토마스의 오랜 동료인 존 샐리가 "조던이 아닌 매직(존슨) 때문에 탈락했다"고 잘라 말할 정도로 조던 한 명 때문이 아닌, 전체적으로 여론이 안 좋아서 탈락한 것인데 가장 토마스를 싫어했던 조던이 탈락시켰다고 억측이 돌았을 뿐이다.[* 애초에 조던은 인터뷰때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라 남은 공개적으로 저격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드림팀 당시에도 조던에게 기자들이 꽤나 집요하게 질문했는데 요리조리 잘 피해가는 조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찰스 바클리]]: 1993 파이널에서 역사상 최고의 파이널 퍼포먼스에 당하며 첫 번째 쓰리핏의 제물이 된 걸로 유명하지만, 그 전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있을 때부터도 심심하면 털렸다. 다만 사적으로 바클리는 조던의 절친이었다. * [[칼 말론]] & [[존 스탁턴]]: 조던의 두 번째 쓰리핏의 제물들. 팀과 본인들의 전성기가 하필 조던의 전성기와 겹치는 바람에 2연속 준우승이라는 쓴맛을 맛보게 되고, 특히 말론은 1998 파이널 6차전에 조던에게 결정적인 스틸을 당하며 패배의 원흉이 된 바 있다. 말론은 이후 말년에 레이커스로 헐값에 이적하면서까지 우승을 노렸으나, 디트로이트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 개인 기록의 측면에서는 말론은 조던에게 밀리는 바람에 득점 2위만 4차례 달성한 바 있다. * [[코비 브라이언트]]: 조던과 가장 유사한 스타일의 선수인데, 하필 조던 바로 이후의 시대에 활약했던 선수라 모든 면이 조던과의 비교 대상이 된 측면이 있다. 물론 상술했듯 조던이 코비를 자기가 남긴 직계 후배이자 동생처럼 여겨 실제 둘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감독 [[레니 윌킨스]], 리더 [[마크 프라이스]]를 필두로 한 젊고 떠오르는 강팀이었지만, 조던과 전성기가 겹친 것이 불행이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4번 붙어 전패하였고, 특히 1989년에는 '''The Shot'''으로 대표되는 전설적인 업셋의 희생양이 되었다. 클리블랜드 입장에서 조던은 르브론 제임스 등장 이전 팀 최대 전성기를 낭비하게 한 원흉이라 부를 만하다.[* 여담으로, 그들은 조던이 은퇴한 1994년에 플레이오프에서 불스에게 밀려 또 탈락한다. 불스를 상대로는 5전 5패.] 이들에게 제일 억울한 점은, 해당 문단의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조던의 라이벌 내지는 희생양으로 언급조차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패트릭 유잉]]''': 해당 분야 끝판왕. 조던의 불스와 플레이오프에서 5번 붙어서 전패하였다. 심지어 조던이 (1, 2차 모두) 은퇴하자마자 파이널에 올라간 것을 보면[* 물론 1999 파이널 당시 유잉은 부상중이었다.], 조던만 없었다면 스포츠에 만약은 없다지만 우승 한 번은 해보고 선수 평가도 더 올라갔을지 모른다. 유잉에게 우승의 적기는 바로 1992-93 시즌이었다. 이때 유잉은 올-NBA 퍼스트 팀 하킴 올라주원과 별 차이가 없는 리그 최고의 센터 중 하나였으며, 팀도 특급 롤플레이어 찰스 오클리, 전 시즌에 가능성을 보이다 이제 완전히 믿음직한 조력자가 된 존 스탁스 등을 위시한 좋은 조력자들과 팻 라일리의 지도로 전력이 절정 (60승)에 오른 시점이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못지않게 조던을 괴롭힌게 바로 이 뉴욕 닉스로 1993년 시리즈에 조던은 평균 32점을 넣었지만 야투율 40%에 그쳤고 연패한 1, 2차전에선 거의 골밑으로 못 들어가는 등 최악의 부진에 시달렸다. 끈적끈적하고 거친 뉴욕을 당해낼 동부팀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이들의 대항마가 될 수 있는 건 유잉을 맞상대할 수 있는 서부 컨퍼런스의 거물 센터들 뿐이었지만 (데이비드 로빈슨과 하킴 올라주원. 오닐은 이때 동부 컨퍼런스였고 플레이오프 실패), 이때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른 두 팀 (피닉스, 시애틀)은 모두 센터가 매우 약하고 골밑 수비가 없다시피한 팀이었다. (시애틀의 수비는 매우 좋지만 골밑 수비는 약했다) 두 팀 중 누가 파이널에 올라왔어도 유잉이 날뛰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팀은 빠른 페이스의 공격팀이라, 이들의 공격을 삐걱거리게 할 만한 강한 수비팀이나 특급 수비력을 지닌 센터에게 약하다. 이 때문에 1994년 플레이오프에선 시애틀이 60승 넘게 거두고도 플레이오프에 턱걸이 한 덴버 너기츠에게 업셋 당한 적이 있다 (디켐베 무톰보의 존재가 컸다) 게다가 뉴욕이 최종전을 세 번이나 치러야했던 1994년 플레이오프와 달리 이때 이들은 1, 2라운드에서 각각 1패만을 안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안착했다. 또한 유잉은 부상 때문에 30대에 접어든 이후 동년배 라이벌들 (올라주원, 조던, 말론, 스탁턴)에 비해 빨리 기량이 줄었기 때문에 아직 최전성기 범위에 있을때 우승을 해야했다. 어떻게 봐도 우승하기 딱 적기인데 조던과 시카고의 존재 때문에 좌절을 겪은 것. 조지타운 대학교 1학년 재학시 NCAA 전국 파이널에서 조던에게 결승 샷을 맞고 준우승에 그친 바 있다. 가히 선수생활 시작부터 끝까지를 관통하는 악연. 그런데 이것과 별개로 조던과 유잉은 절친이었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NCAA 파이널이었지만, 1984 올림픽 대표팀에 팀의 기둥 역할을 하면서 급격히 친해진 것. * [[팻 라일리]]: 19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를 이끌면서 이미 많은 우승을 맛봤고, 2000년대 이후 마이애미 히트의 수장으로도 우승을 만들며 이미 엄청난 업적을 세웠지만, 1990년대에 조던과 플레이오프에서 4번 만나 역시 전패하였다. 문서에도 있지만 뉴욕에서 2번, 마이애미에서 2번 만났다. 오죽하면 [[마이클 조던/어록]]에도 있지만 "왜 다시 복귀해서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라고 할 지경. * [[레지 밀러]]: 1990년대 은근히 강팀이었던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최고의 선수. 레지하면 조던보다는 뉴욕 닉스와의 악연이 깊은 선수로 조던과는 거의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밀러가 가장 우승에 근접했을 시절인 1998년에 조던과 만나서 7차전의 혈투를 벌인 뒤 패했다. 만약 여기서 조던을 이겼다면 밀러의 평가 자체가 달라졌을 것. 2000년도 인디애나가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1998년의 인디애나의 전력이 더 좋았다는 평도 있었고 무엇보다 딱 5점차로 7차전에서 패했기에 정말 아쉬웠을듯. 밀러는 조던과는 개인적으로도 주먹질을 하다가 퇴장을 당한적도 있다. 본인의 주장대로 올스타나 올-NBA 팀에도 조던에 밀려 많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올스타 같은 경우는 무조건 가드 한자리는 조던이기 때문. 물론 조던 다음에 드랙슬러도 있었고 다른 인물들도 있었지만 조던과 포지션이 겹치기에 조던이 없었다면 최소한 올-NBA 세컨드 팀, 서드 팀에는 몇번 더 올랐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건 선수 시절에 그랬고, 은퇴 이후에는 조던을 존경하고 공개적으로는 농담도 하는 사이. 자신의 명예의 전당에서 조던을 노골적으로 밀친것에 대해서 "그래 조던, 나 너 밀친것 맞아" 하고 쿨하게 인정하고 조던도 웃는 사이가 되었다. im preview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함으로써, 사용자는 본인이 기여한 콘텐츠가 CC BY-NC-SA 2.0 KR에 따라 배포되며, 해당 콘텐츠에 대한 저작자 표시를 하이퍼링크나 URL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또한, 이 동의는 기여한 콘텐츠가 저장되고 배포된 이후에는 철회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18.119.156.220)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